조선일보
[의학의 창]
옥시 사태가 일깨운 사회의학의 중요성
입력 : 2016.05.25 03:00
옥시 사태 실체 규명엔 예방의학 전문의들이 큰 활약
수요에 비해 인력 턱없이 부족… 지난 10년간 단 78명만 배출
국가에서 장기적 안목 갖고 의료 인력 수급 계획해야
최근 전 국민적 분노를 사고 있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세상에 그 숨겨진 실체를 드러내게 된 곳은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이었다. 급성호흡부전을 주 증상으로 하는 7명의 임신부 환자로부터 시작된 역학조사가 확대돼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세계 최초의 바이오사이드(biocide·살생물제) 사건'을 규명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역학 전문가들이 중추 역할을 했다. 역학(疫學)이란 환자 개인의 치료보다 인구집단 전체를 대상으로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고 전염병 등 경로를 차단하는 데 집중하는 학문으로, 예방의학 전문의 중 일부가 이 분야를 전공한다. 문제는 우리나라에는 이 예방의학 전문의가 태부족이란 점이다. 지난 10년간 배출된 인력이 단 78명뿐이다. 작년 메르스 사태를 겪은 후 질병관리본부와 각 지자체가 역학조사관을 추가로 채용하려고 발버둥쳤지만 아직도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메르스 후속 조치로 감염관리법이 개정돼 향후 300병상 이상 종합병원은 의무적으로 감염내과 전문의를 채용해야 한다. 하지만 병원들은 의사를 구할 수 없어 아우성이다. 현재 가용한 감염내과 전문의는 총 170여 명 정도이고 매년 겨우 10여 명이 신규 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해가 갈수록 전문 과목 간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외과, 흉부외과, 비뇨기과는 외과계열 3D 과로 불리며 대형병원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미달이다. 최근에는 내과조차 상당수 수련병원에서 미달 사태가 속출했다. 한때 빈사 상태에 빠졌던 산부인과와 소아과에 조금씩 지원자가 느는 건 그나마 위안이다.
의사라는 직업도 시장 논리에 따라 인기가 출렁거린다. 하지만 의료 인력의 수급에 관해서는 국가와 사회가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계획하고 개입해야 한다. 의사 인력 양성에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10년 넘는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미리 그 수요와 배치를 예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시절 가장 성공적인 전문인력 양성 사례는 응급의학과라 할 수 있다. 정부가 응급의료수가를 만들고 권역응급센터와 지역응급센터 양성에 나선 이후 양질의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꾸준히 늘었다. 지금도 매년 150명이 넘는 전문의가 배출되고 있다.
전문의 제도 자체의 혁신도 필요하다. 작년 말 통과된 전공의 특별법이 올해 하반기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이에 따른 후속 조치로 전공의 수련 제도의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불가피해졌다. 내과학회와 외과학회도 기존 4년 수련 기간을 3년으로 줄이고 세부 전문의 제도를 도입하는 멀티트랙(multi-track)화를 천명하고 나섰다. 1958년에 최초로 인턴 레지던트 제도가 시작되고 60년 가까이 흐른 오늘, 의사 수련 제도의 대변혁이 예고되고 있다.
바야흐로 임상의학 전성기가 저물고 사회의학이 재조명받고 있다. 사회의학이란 공중보건학, 예방의학, 직업환경의학, 법의학 등을 아우르는 것으로, 사회적 조건과 연관해서 의학을 바라보는 관점을 말한다.
사실 1인당 국민소득이 5000달러를 밑돌던 저개발 시대에는 기생충 박멸, 공중위생 강화 등 낮은 단계의 사회의학이 임상의학만큼 중요했다. 이후 경제개발과 함께 보건의료의 영역은 변방으로 밀리고 개인의 건강 증진과 임상적 치료가 중심을 차지했다. 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에 가까워지면서 국제화, 신종 감염병, 환경 파괴 등의 문제가 대두됐고 더 높은 사회의학적 접근이 필요해졌다. 따라서 모든 의사들에게 사회의학적 관점을 교육하고 이 분야 전문가를 전략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가습기 세척제 사건을 밝혀낸 2011년 당시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장인 고윤석 교수는 말했다. "결국 상태가 나빠진 환자는 모두 중환자실로 온다. 중환자 전문의야말로 비인기 종목이지만 이 분야 프로페셔널을 키워내고 유지해야만 최후 보루를 지킬 수 있다. 그러려면 정부와 사회가 투자를 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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