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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를 쐈지만 그는 선각자였다”

안청장 2009. 3. 27. 13:35

“이토를 쐈지만 그는 선각자였다” [중앙일보]

순국 99주년 … 일본이 보는 안중근 의사
100년 전 평화사상에 감명
“일제 재판 부당했다” 지적

 

안중근 의사의 장인掌印)과 얼굴 사진을 합성한 그림
 일본에서 안중근 의사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냉철하게 이뤄지고 있다. 보수 우파들의 시각으로는 테러리스트라는 인식이 전형적이지만, 이들 사이에도 “안 의사는 나라를 구하려고 했던 의사”라는 인식이 동시에 퍼져 있다. 당시 조선 사정으로 보면 이토는 조선의 흉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적 배경 때문에 일본에선 안 의사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재일 한국 학자들과 일본인 학자들이 28일 교토(京都)에서 개최하는 ‘한·일 국제평화심포지엄’의 초점도 ‘안중근 의사’에 모아지고 있다. 안 의사가 남긴 글과 사상을 돌아보는 전시회와 함께 ‘안중근은 왜 이토를 쏘았는가’라는 주제의 심포지엄도 열린다. 이 행사를 주최하는 ‘한국 병합 100년 시민 네트워크’ 엄창준 사무차장은 “일본의 우파들조차 안중근은 적이지만 가상한 용기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일본 근대사에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 됐다”고 말했다.

이 심포지엄에서 ‘안중근 의사와 역사의 기억’이란 제목으로 주제 발표에 나서는 호세이(法政)대 마키노 에이지(牧野英二) 교수는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가 펼친 영구평화론과 안중근의 평화론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의 칸트철학회 회장인 마키노 교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토를 처단한 것”이라며 “일본의 독립도 위태롭게 될지 모르는 격변의 시대 상황에서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서 의거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안 의사의 평화 사상은 일본 지식인들을 감명시키고 있다. “국제 분쟁지인 뤼순에 국제은행을 설립하고 국제학교를 만들어 2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안 의사는 시대의 선각자였다는 것이다. 마키노 교수는 최근 논의되고 있는 아시아통화기금(AMF)도 안 의사가 주창한 동양평화기금 사상에서 이미 제기됐다고 보고 있다.

일본에서는 재판의 불법성도 비판되고 있다. 도쓰카 에쓰로(戶塚悅朗) 류코쿠(龍谷)대 법과대학원 교수는 ‘안중근 재판의 불법성과 동양 평화’라는 주제발표에서 “의거 당시 안 의사는 일본 사람이 아니었다”며 “일본 땅이 아닌 외국에서 외국인이 한 범죄는 재판권이 없다”며 일제 재판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다.

또 일본에선 안 의사의 의거는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평가하는 시각이 많다. 의거 이후 안 의사가 보여준 숭고한 이상과 고결한 행동도 이런 평가의 배경이 되고 있다. 뤼순 감옥에서 안 의사 감시 업무를 맡았던 헌병이던 지바 도시지(千葉十七)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그는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과 인격에 크게 감동받아 전쟁이 끝난 뒤 고향인 미야기(宮城)현 센다이(仙臺)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집에서 매일 안 의사에게 제사를 지냈다. 미야기현은 1981년 현 내 사찰에 안 의사와 지바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이토를 수행하다 안 의사가 쏜 총알을 다리에 맞았던 남만주 철도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靑次郞)도 안 의사의 사상에 크게 감명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훗날 “일본인으로서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안중근은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넓적다리에서 꺼낸 총탄은 ‘안중근이 발사한 총알’이라는 안내 문구와 함께 일본 헌정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도쿄=김동호 특파원